이기희칼럼[동서교차로]East Meet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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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너무 늦은 걸요.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
표지 사진

“어림없어요. 엄마가 어떻게 책을 내.” 저녁 밥도 안 챙겨주고 원고지와 씨름하던 날 보고 아들이 불평을 했다. 7년 전 한글 자판기도 누를 줄 모르는 주제에 이십 년 가까이 밥하고 돈벌던 엄마가 뜬금없이 책을 쓰겠다니 쇼크를 먹은 것도 당연 하다. “왜 안 돼. 책 나오면 어쩔건데?” 황야의 무법자도 이 때 처럼 비장한 마음 으로 맞서지는 않았을 거다. 사태가 심상찮음을 직감한 아들이 급선회로 후퇴한 뒤 통계자료와 실패 사례을 디밀었다. 해리 포터를 쓴 롤링같은 훌륭한 작가도 처음엔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 성공률이 1% 미만이니 완전한 시간 낭비다. 못 오를 나무 오르다 건강 해치면 우리 가슴이 얼마나 아플까 등등 위하는 척 했지만 무경험의 아줌마 실력을 물로 보는 게 뻔했다. 식구들의 눈치와 박대(?)를 무릎쓰고 글쓰기를 감행해 그로부터 1년 후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녀석은 꿀 밤 두 대를 머리통에 얻어맞고 풀이 죽었었다. 별난(?) 인생을 산 여자가 사십 줄 넘어 쓴 첫 소설이라 잡지사와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가 방영됐고 이어 자전 에세이 ‘여왕 아니면 집시처럼’이 출간됐다. 내 속에서 쿰틀거리는 ‘나’를 믿고 감행한 모험이었다. 덕분에 문학을 꿈꾸던 소녀시절의 꿈을 다시 품게 됐다. 불확실한 1%에 목숨 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컨드 라이퍼(Second Lifer)란 여러 가지의 명함을 꿈꾸는 사람을 뜻한다. 대기업 연구원이면서 살사 댄서클럽에서 춤추는 여자 치과의사면서 행위미술 작가인 남자 전업 주부로 살다 뒤늦게 모델과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여성이 여기에 속한다. 매년 소비자층을 분석해 이슈가 되는 자료를 소개하는 트렌드 정보사(PFIN)는 현재 가진 직업 외에 또 다른 직업을 갖거나 준비하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라고 발표했다. 이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 또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행복과 즐거움의 출발을 ‘나’라는 ‘자신다움’에 두고 있다. 어떤 연유던지, 삶이 내가 원하지 않는 곳을 향해 가더라도 과감하게 U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인생은 벌금없이 언제든 U턴이 가능하다. 인생의 골목 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좁아진다. 지체 하면 U턴 조차 하기 힘들다. ‘내일 내일’ 말하는 사람치고 내일 시작하는 사람 본 적 없다. 내일은 너무 늦을 지 모른다. 내일은 오지 않는 시간일 수도 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 내일은 어제와 함께 출발했어요. 벌써 늦은 지도 몰라요. (중략) 일어나 크게 소리쳐봐요. 내일은 지금 시작하는 것이라고. 지금 이순간 내일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여태 날 이끌어 줄 누군가를 찿아 헤맸어요. 이제 알았어요. 내가 바로 내 인생을 이끌어 갈 주인공이란걸.” 영혼을 적시는 목소리로 그래미 어워드을 수상한 존 레전드의 ‘If You are out there“의 노랫말이다. 더 이상 누구에게 매달릴 필요도 더 이상 기다릴 필요도 없다. 스스로에게 손을 내밀 시간이다. 시작을 꿈꾸는 사람의 내일은 죽지 않는다.
슬픔과 아픔, 기다림의 시간을 지우고 설레임으로 또다시 나를 맞을 시간이다. 어제는 살아있음에 축복이었다. 오늘은 오늘의 잔으로 가득 채우면 된다. 지금 시작하리라. 첫사랑처럼 가슴설레는 믿음으로 출발하리라. 별과 태양과 우주를 가슴에 품고 다시 시작하리라. 내일로 미루기엔 지금 이 순간 심장의 피가 너무 힘차게 뛰고 있지 않는가.

중앙일보 0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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