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KEE HEE
Home
Note From Kee Hee
Biography
Weekly Column
Business Ventures
Articles & Interviews
Publications
Links

이기희칼럼 [ 동서교차로 ] East Meet West

내 인생의 순례자

 

 

 

 

 

 

 

'Integrated Wonder II'
by Cecil K


순례자의 발걸음은 느리다 . 서두르지 않는다 . 곁눈질 하지 않고 묵묵히 제 길을 간다 .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길 위에서 헤매지 않는다 . 멈추지 않는 살아있는 자의 고된 발걸음으로 순례자는 생을 마감한다 .
박완서 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했다 . 선생님은 앞서 간 내 영혼의 순례자다 . 먼저 간다며 날뛰지 말고 꽁지에 붙어있어도 실망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침 주신 분이다 . 선생님의 작품들은 차분하지만 섬뜩하고 냉철한 문체로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소박한 인간들의 삶을 다정한 눈 빛으로 담아냈다 .
내 어릴 적 꿈은 한국 문학을 세계적으로 빛내는 문인이 되는 것이었다 .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 당선돼 고 김춘수 선생님으로부터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듣고부터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며 분홍빛 미래를 꿈꾸었다 . 그러나 유신의 그림자가 암울한 70 년대 , 문학을 한답시고 삼류인생으로 변방을 떠돌던 우리에겐 막걸리 한 잔 사 먹기는 커녕 끼니를 때울 돈도 없이 모두 가난했다 . 김원일 선생님의 동생인 고 김원도 시인 , 동인회의 막내였던 이창동 감독과 주변문학' 동인회를 만들고 시화전을 열기도 했지만 우리는 늘 춥고 배가 고팠다 .
문학이 밥도 돈도 술도 안 되는 허공에 날리는 슬픈 외침이란 회의에 빠졌고 나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 문학이 아니면 내 삶에 의미가 없다'는 스스로의 독백을 뒤집을 만큼 그 때 그 사랑은 내 청춘을 저당 잡힐 만큼 뜨겁게 불타 올랐다 . 졸업과 동시에 결혼 , 날 사랑하는 동료 교수님 가족들에게 배신 때리며 주한 미육군 보급사령관의 아내가 돼 도미했다 .
그리고 여느 여인네처럼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아이 낳고 여가 나면 그림 그리며 가정주부로 열심히 살았다 . 꿈은 밟혀도 다시 자라나는 잔디처럼 목숨이 모진 것일까 ? 하루 종일 모국어 한마디 못하고 서툰 알파벳으로 미국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서도 한국말이 그리워 꿈 속에서도 자음과 모음을 찾아 헤맸다 .
그 때 나는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됐다 . 아니 선생님의 작품보다 더 눈 독을 들여 들여다 본 것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 40 세에 등단해 문단의 주목을 받은 선생님 약력이다 .
가슴에 피가 솟구쳐 올랐다 . 나에게도 아직은 시간이 남아있다며 절망의 시간들을 추스리곤 했다 . 선생님 등단 나이에서 내 나이를 제하며 15 년 , 10 년 , 7 년 , 3 년 하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내 나이가 마이너스로 돌아섰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과 용기를 버리지 않는다 .
꿈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보듬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살아있는 동안 앞서 간 순례자의 길을 따라 그 흔적을 더듬다 보면 언젠가 진솔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훈훈한 사랑이 담긴 책 한 권 쓸 수 있지 않을까 ?
선생님은 남편과 자식을 석 달 간격으로 먼저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으셨다 . 그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것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인생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 늦지도 빠르지도 않는 처연한 발 길 옮기는 순례자의 길일 것이다 . 앞서 간 그 길을 누군가가 따라가고 그 길을 또 다른 사람이 따라간다 .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 갈 때 삶의 표본이 되고 넘어질 때 용기가 되는 분들이 있는 삶은 축복이다 . 선생님은 한계를 알고 주춤할 때 그 한계를 넘어서라고 앞서 가면서 손 짓을 해 주신 분이다 .

 

중앙일보 1.28.11

<< Previous...................................Archives...................................Next>>
Untit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