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KEE HEE
AIaEnA硤[좯AI]East Meet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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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아름다움

'Wind Bamboo'
By Kee Hee Lee

실상(實像)과 허상의 차이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어떤 물체를 알아 볼 수 있는 건 물체에서 사방팔방으로 발산되는 빛 때문이다 눈동자는 이런 빛들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발광지점을 추측해 내고 빛이 모이는 지점을 알아내 물체를 인식하게 된다.
물체는 그 빛을 발산하는 한 지점에 존재하게 되는데 빛이 모이는 집합체가 실상이다. 반면에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는 빛의 집합체가 허상이다. 허상은 수많은 빛의 경로가 우연히 한 지점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현상이다. 거울이 그 대표적인 예다. 거울은 거울 뒷 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거울을 만져보면 물체가 잡히지 않는다.
실(實)은 진실(眞,the truth)을 말한다. 사실(reality)이고 현실(actuality)이며 성실함(sincerity)이 배어있고 실질적(substance)인 것에 기초를 둔다.
허(虛)는 속이 비어있는 것을 말한다. 원기나 기력이 없는 상태나 준비되지 않는 것과 약점등도 허에 속한다.
실상(實相,real facts)은 실제 모양이나 상태를 말한다.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 실상이다. 실은 있고(有) 없음(無)과는 구별된다. 컵에 반 쯤 차 있는 물은 실(實)이다. 물이 없이 비어있는 부분이 허다.
삼라만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인생의 무상을 알게되면 집착을 끊을 수 있어 허(虛) 속에서 유(有)를 발견하고 참된 깨달음인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비우지 않으면 체울 수 없다. 비우는 것이야 말로 허로 실을 구하는 지름길이 된다
동양화는 여백을 중시한다. 취함(取, Solid)과 버림(舍, Void)을 과감하게 함으로서 허(虛)와 실(實)을 통해 여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성김과 빽빽함, 이완과 긴장, 모임과 흩어짐, 마름과 젖음, 강함과 부드러움, 가림과 드러남, 가벼움과 무거움, 큼과 작음이 여백과 함께 두루 연을 맺는다. 지백수흑(知白守黑)은 서법의 분포를 비유한 말로 백(白)은 먹이 안 간 곳 즉 그려지지 않는 허를 말하고 흑(黑)은 먹이 있는 곳 곧 붓이 지나간 곳을 의미한다. 허로써 실을 구하는 것이 어찌 서예나 그림 뿐이랴! 비어있는 것은 차있는 것보다 넉넉한 여유로움을 가진다.
예로부터 여백은 기(氣)의 표상으로 여겼다. 여백은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빛과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미래의 힘이다. 한국의 미를 여유있는 '여백의 미'라 일컽는다면 허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있다. 대나무가 사군자 중에 으뜸으로 꼽히는 건 비어있는 것을 끌어안고 있는 단단함 때문일 것이다. 마디마디 한을 품고도 꺽이지 않는 정절과 무릎꿇치 않는 비장함을 예사롭지 않는 기품에 담고있다.
대나무는 좀처럼 꽃을 피우지 않는다. 꽃이 필 땐 전 대나무밭에서 일제히 피는데 영양분을 모두 소모하기 때문에 말라 죽는다. 더 이상 끓어안고 목숨바쳐 지켜야 할 마음의 빈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잡을 수도 없고 만져 보아도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살아 있는 것들의 실상이 아닐까. 살아있다는 것은 착각 내지 착시 현상에 매달려 허상을 쫒아가는 목 마른 자들의 긴 행렬일지 모른다. 어제의 못다한 그리움을 삶의 여백 속에 담고 아직 차오르지 않은 내일을 향해 가슴 설레는 사람들의 오늘은 비어있지만 가득 차있다.
비어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지면 허둥대는 삶 속에서 그대에게 바칠 꽃 한다발을 가슴 속에 품을 수 있으리.

중앙일보 200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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