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KEE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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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칼럼[동서교차로]East Meet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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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나를 보낸다.

'Grace'
By: Anna Razumovskaya

여우에게 홀리면 뼈도 못 추린다. 여우는 정욕이 세기로 감당할 자 없어 한 번 홀리면 신허(腎虛)의 병을 얻어 골로 간다.
개과에 속하는 여우는 몸통에 비해 꼬리가 길고 주둥이가 가늘고 예리하다. 지금은 멸종 위기에 있지만 산림이나 초원, 야산이나 노출된 곳을 좋아해 옛날부터 인가 주변에서 자주 나타나곤 했다.
구미호(九尾狐)는 황금빛 털을 가진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다. 현중기(玄中記)에 의하면 여우가 천년을 묵으면 구미호로 변한다고 한다.
구미호의 수준에 다다른 여우는 이미 하급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는데 선도를 터득하면 천호(天狐)가 되어 천계로 올라가 옥황상제를 보좌하게 된다.
동아시아 전설에 나타나는 구미호는 표독하고 간사한 여성으로 묘사되는데 아리따운 미모로 둔갑해 남자를 호린다. 한국 전설 속 구미호는 해를 끼치는 요물이기보다는 인간이 되고 싶은 강한 소망을 품은 여인으로 등장한다.
여자로 변신한 구미호는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지만 종국에는 정체가 발각 나 파멸에 이른다. 숙명적인 만남과 이룰 수 없는 사랑, 행복한 결혼과 파탄에 이르기까지 드라마보다 더 생생하고 비극적인 전설이다.
몽달귀신은 총각귀신이다. 결혼 안하고 죽어 제사 밥도 못 얻어먹는 억울한 고혼이라서 이승을 떠돌아 다닌다. 처녀귀신은 총각귀신보다 더 불쌍한 영이다.
총각귀신은 바람이라도 피워봤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 짓거리도 못해 본 원한 때문에 기어이 총각귀신을 만나서 백년해로 해야 한을 풀고 이승을 떠난다. '혼인'이란 절차를 안 거치면 저승길에도 차별 대우를 톡톡히 받게 된다.
결혼은 강을 건너는 것. 한 번 건너고 나면 이 전의 풍경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변치 않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참고 견디며"라는 구절처럼 파뿌리가 닳아 없어져도 잡은 손 놓지 않고 노 젓기를 계속하면 강을 건널 수 있다. 행복한 부부들은 열정과 로맨스보다는 돈독한 우정으로, 갈등과 문제를 지혜롭고 젊잖게 극복한 사람들이다.
사랑은 홀림이다. 그 홀림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 앞 뒤 분간이 힘들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에게 홀랑 넘어가 일생을 걸 각오를 한다. 사생 결단하긴 여우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사랑해선 안 되는 금기를 깨고 신이 되기를 거부한 채 목숨 바칠 각오를 한다. 결혼은 금기다. 깨어서는 안 되는 약속이다. 천년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구미호처럼 인간을 만나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꿈꾼다.
우렁각시는 밭 일 나가는 총각을 위해 매일 몰래 밥상을 차려준다. 총각의 사랑과 정기를 받아 각시는 인간이 되지만 마음씨 나쁜 왕이 각시를 뺏기 위해 여러 수로 둘을 괴롭힌다. 고난도의 시험 없이 사랑을 말하지 말라는 대목이다.
봄, 봄, 봄이 활짝 꽃을 피웠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속고 사랑에 콩깍지 씌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를 계절이다.
구미호처럼 요란스럽게 혼을 뺏지 않더라도 우렁각시처럼 든든한 밥상 차려줄, 그 밥상에 마주 앉을 누굴 위해 옷깃 다듬을 시간이다. 결혼은 티 내지 않고 몰래 차려주는 밥상이다.
밥 한그릇에 정성을 담아 그대에게 보낸다. 신이 되고픈 마음을 접고 그대 곁에 남아, 온전한 인간되길 꿈꾸며, 꽃잎에 사랑 담아 그대에게 봄을 보낸다.

중앙일보 0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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