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KEE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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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칼럼[동서교차로] East Meet West

미국에게 배운다.

 

 

 

 

 

 

 


'Allegorical Mask II'
By: Schluss


도적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고 남 흉도 입을 맞춰야 재미있다. 죽이 안 맞으면 한 쪽에서 아무리 용을 써도 별 볼일 없어진다. 가십이나 불평불만이 해결책을 강구하진 못해도 작당해서 함께 노닥거리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 본질이야 어찌됐건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올해는 여행할 때마다 고초를 겪는다. 연착과 노선 변경은 보통이고 정비사고에다 아예 운항이 취소된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난 번 여행 땐 천둥번개로 공항이 임시 폐쇄되고 이ㆍ착륙이 금지돼 하루 넘게 공항에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됐다.
공항 내 호텔은 만원, 호텔 배정 안 된다며 각자 알아서 하라고 통보 받은 게 밤 12시. 호텔비는 각자 지불, 날씨 때문에 바뀐 스케줄은 항공사에서 책임질 수 없단다. 어찌어찌해서 호텔을 잡았지만 짐이 미리 간 덕에 세면도구와 화장품이 없어 생얼(맨 얼굴)로 호텔비 지불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는데 다음날은 더 청천병력!
배정된 내 스케줄이 대기자 명단에 있었다. 대기자 55명에 내 순번은 12번, 미스 유니버스 합격자 발표 기다리듯 가슴 졸였는데 첫 번째 탑승자 명단에서 탈락. 두 번째 비행기는 순서가 6위, 순번 5번까지 탑승해 또다시 탈락하는 비운을 맞게 됐다. 이쯤에서 자존심, 체통, 시민의식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직원에게 갖은 이유와 변명, 회유와 압박, 급기야 아양까지 동원해 오늘 못 가면 안 된다고 죽는 시늉해 내 돈 주고 구걸하듯 집 쪽으로 되돌아가 타는 비행기표를 배정 받았다.
일이 이쯤 되니 머리가 아프고 속이 부글거려 누굴 붙잡고 하소연이든 분풀이든 해야 할 판국이었다. 어린 애 둘 데리고 같은 호텔에 투숙한 여자를 골라 "이건 완전 항공사 횡포야 횡포! 늦게라도 떠야지 취소가 뭐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 라며 일지매의 의협심까지 섞어 열불 나게 떠들었더니 대답은 딱 한마디 "그래(True)" 뿐이다. 입이 안 맞으니 대화가 될 리 만무하다. 표정관리 안 되는 사람 몇 골라 찔러봐도 묵묵부답. 그들의 인내심엔 혀를 내두를 정도다. 맞불 놓는 자가 없으니 제 풀에 죽어 우아함과 교양 떠는 쪽으로 평상심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미국에게 배운다. 새 영어 단어를 익히듯 미국을 공부한다. 배울 것 안 배울 것 가려서 공부한다. 목 안 빼고 내 차례 기다려 느긋하게 줄 서는 법, 공공장소에선 휴대폰 소리 죽여 간단히 대답하고 외국인 앞에서 한국말로 크게 떠들지 않는 것. 남 일에 넙죽거리지 않고 타인의 의사와 자유를 존중하는 예의도 지킬 줄 안다. 나라와 국가, 세계 평화를 위한 엄청난 구호를 외치진 않지만 내가 속한 지역사회와 이웃에게 차분히 봉사하는 성실함도 배웠다.
문제는 보통 땐 잘 나가던 시민정신이 일만 터지면 본색이 드러나는 것. 인내심 박약, 자유와 권리의 착각, 근거 없는 비판과 섣부른 판단, 주변도 못 챙기면서 세상 온갖 문제를 떠 안고 고심하는 듯 오버하는 실수를 범한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시민의식은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태도고 마음의 자세다. 나는 미국에게 배운다. 맹하지만 착하게 질서를 존중하는 미국 시민정신을 배운다. 반 평생을 미국에서 살았어도 여태 모르는 것이 아는 것 보다 많다. 그래도 주눅 들지 않는다. 미국 사람이라고 미국을 바로 알고 다 잘 알지는 않는다. 스스로 떳떳해지기 위해 나는 미국을 공부한다.
평등한 한 인간으로 존경 받는 삶을 살기 위해 한 순간도 나태해 질 순 없다.

중앙일보 8.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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