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칼럼[동서교차로]East Meet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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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열 네 시간

Surgal
By Hal

강건너 불구경하긴 쉽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닐 때는 아무리 큰 재난이라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지나치기 쉽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겅보고 놀란다고 나이먹고 제일 많이 하는 짓이 잘 놀라는 거다. 살면서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우친 때문일까. 아님 마음 먹은 데로 안되는 것이 세상 만사란 걸 깨우친 때문일까.
청춘시절엔 나도 어지간히 간 큰 여자에 속했는데 세월이 내 간을 작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녀석이 간댕이만 크다'는 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세상물정 모르면 간댕이가 클 수 밖에 없다. 산전수전 다 겪고나면 사는 게 두려워져 간이 점점 작아진다. 사는게 무섭다는 어른들의 말을 깨우칠만큼 철이 든게다.
허리케인 '아이크'로 텍사스가 물바다가 됐다. 허리케인(Hurricane)은 우리말로 '싹쓸 바람'으로 강한 폭풍이다. 에스파냐어의 우라칸 (Huracan)에서 유래됐는데 '폭풍의 신' '강대한 바람'을 의미한다. 400만 명이 주택 침수와 정전으로 고통받는 엄청난 피해상황을 뉴스로 접하면서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지냈다. 지난 몇 년동안 너무나 끔찍한 재해를 많이 본 탓일까. 콩알만큼 작아진 간도 왠만큼 큰 일에는 호들갑을 떨지않을 만큼 면역성을 갖게 됐다.
그런데 이번엔 '남의 집' 불이 내 집으로 까지 번지게 된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몇 달동안 벼르던 장보러 한국 마켓을 갖다 오다 중동부를 강타한 아이크의 꽁무니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차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겁이 더럭 나서 사람들의 차량을 뒤쫒아 일반 도로로 내려 섰지만 센 바람은 그칠 줄 몰랐다. 눈 앞에서 나무들이 쓰러지고 꺾이면서 언제 내가 타고 있는 차 위로 덮칠지 모를 긴박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아이들이었다. 풋볼 구경하러 친구 집에 간 아들에게 차 속에서 전화를 하고 강풍 주의보가 끝날 때까지 집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또 미시간에 있는 딸에게 꼼짝달싹 말라고 SOS 주의보를 쳤다. 마침 딸은 개스값 구걸하는 주제에 일부러 돈을 주고 멍멍이를 강아지 학교에 데리고 가는 중이라고 했다. 강아지 키우는 연습 잘해 시집가면 예쁜 손자 손녀 안겨 주겠다며 아양을 떤다. 급해서 일단 볼기작 때리고 싶은 마음을 접고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용돈깍을 궁리를 하며 빨리 아파트로 돌아가라고 다그쳤다. 죽을요량으도 강풍을 뚫고 집 근처까지 차를 몰고 왔다. 그러나 뿌리마저 몽땅 뽑힌 나무와 쓰러진 전신주로 길을 막은 뒤였다. 우여곡절 끝에 구사일생으로 동네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그 집 잔디밭을 가로 질러 집으로 무사히 들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전화가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라디오와 TV 컴퓨터 세탁기 전기밥솥 선풍기 마이크로 웨이브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바깥세계로 연결되는 단 하나의 끈은 얼마나 버틸 줄 모르는 셀룰러폰 하나 뿐이었다. 어둠이 깔려오자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비상 품목으론 배터리가 시원찮은 흐릿한 손전등 하나 있을 뿐이다. 아낄 것 안 아끼고 안 아낄 것 아끼는 무사안일주의 덕분에 배터리용 라디오 건전지 손전등을 사 놓지 않았던 것이다. 애써서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 마음을 다잡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이 증폭됐다. 만사태평인 내 반쪽(남편)은 그 난리 통에도 일찍 취침해 잘도 자는데 세일에 무더기로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둔 고기가 상할까봐 잠을 설쳤다.
도시를 음흉하게 내몰던 강풍은 7시간 만에 잠잠해졌다. 전기 전화는 14시간만에 복구됐지만 도시 전체가 정상화 되기까진 일주일 이상이 걸릴 것이라 한다. 남부 갤버스턴의 고립된 주민들은 한 달을 기다려야 전기가 복구된다니 내가 당한 두려움에 30배를 곱하며 민망한 생각에 고개를 조아리고 싶은 심정이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더라도 함께 아파하면 가슴 속에 있는 따뜻한 불씨를 건네 줄 수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 09.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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