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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2005!] 미국 미술계 '큰손' 이기희씨[LA중앙일보]

생활 속 그림...'갤러리 혁명' 이끌 것

오하이오주 중소도시인 센터빌에 갤러리 바람을 일으킨 이기희(51) 씨. 1998년 현대미술 작품을 전문으로 전시 판매하는 9000 스퀘어 피트 규모의 윈드 갤러리를 개관하고 2002년에는 같은 장소에 종합 예술교육 센터인 센터빌 창작예술센터(Centerville Creative Arts Center)를 열었다. 이어 올 해에는 신시내티에 가구와 디자인 소품을 판매하는 6000 스퀘어 피트 규모의 디자이너스 마켓 플레이스(Designers' Marketplace)와 두번째 윈드 갤러리(2000 스퀘어 피트)를 열었다. 개인이 개관한 전시장 규모와 작품 수량으로 전국에서 손꼽히며 중서부에서는 최대다.
동양화가이기도 한 이 씨는 또 콧대 높기로 유명한 뉴욕 그래픽 소사이어티와 에디션 리미티드 벤틀리 하우스와 작품 25점의 복사판 제작을 계약했고 한글 자전소설 '찔레꽃'과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을 출간했다.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는 미술 시장에서 '큰손'으로 부상한 이 씨는 "내 특기는 일 저지르기와 새로운 거 배우는 것"라고 말한다. 도전이다.
영국출신 사이먼 불 같은 세계적 화가의 초대전을 아무렇지 않게 열 수 있는 이 씨의 인생은 '나는 도전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선머슴 결혼하다=2살 때 아버지를 여윈 그는 그림과 문학을 사랑했다. '백목련'으로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서 당선했을 때는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대구에서 노천명 같은 여류시인이 한 명 나올 것"이란 가슴 뛰는 칭찬도 들었다. 집안 형편상 계명대 국문과에 진학한 뒤 2학년 때 '시문학'으로 등단했고 전 문화부장관 이창동 김원도 안효일 등과 '주변문학' 동인 활동도 했다. 그러면서도 미대 강의를 청강하며 그림의 꿈을 접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스스로 말하듯 선머슴이었다. "학생회 부회장을 했는데 사실은 회장보다 득표율이 높았다. 여자니까 회장을 못했다. 그러고도 학생회 안에서 왕따였다. 그래서 일을 저질렀다. 육영수 여사에게 편지를 보내 개교 20주년 행사때 학교를 방문해 달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됐다."
육 여사와의 만남은 인생관을 바꾸었다. "선머슴처럼 살던 내가 여자가 여자다운 게 이렇게 아름다운 거구나 알았다. 쇼크였다. 5월과 6월에 청와대서 육 여사를 만났는데 한복 차림으로 손을 흔들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 학처럼 고왔다."
현모양처를 비웃고 남녀는 평등하며 결혼하면 꿈을 포기해야 된다는 신념이 흔들리고 있을 때 한 남자를 만났다. 주한 미군 보급사령관 제임스 버드월스 대령. 이 씨는 한국어를 가르치던 미국공보원(현 미국문화원) 원장이 초대한 독립기념일 행사장에서 버드월스 대령을 만났다.
"육 여사 뵌 것과 독립기념일 행사의 앞뒤가 바뀌었으면 결혼 안했을 겁니다. 육 여사가 안돌아가셨어도 청화대로 들어갔을 테고.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상황은 결혼으로 몰려갔다. 식사 현장을 총장에게 들켰다. 총장은 버드월스 대령이 총각이고 집안이 좋다는 조사까지 하고는 "결혼하던가 만나지 말던가"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주변 사람을 챙겨야 했던 보스의 생활 속에서 가만 있어도 모든 걸 챙겨주는 버드월스 대령은 편했지만 '미국 사람 만난다'는 소문에 교사 부임 3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미국 사람과 사귀면 양공주였던 시절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75년 5월 22세에 42살의 총각과 결혼했다.
◇오기로 미술을 하다=남편이 대령인 덕에 그는 '낙하산 이민생활'을 시작한다. 공항에서 팡파레에 꽃다발을 받은 뒤 어디가나 '맴' 소리를 들으며 상석에 앉았다. "밀가루를 뒤집어 써도 예뻤던" 꽃같은 스물 셋이었지만 유독 한 장군의 부인이 대놓고 구박했다. 유명한 패브릭 디자이너였는데 동양화를 그린다는 걸 안 뒤로 "기희 이거 알아"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시했다.
"더 유명한 상업 미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싱클레어 대학에서 응용미술학과 실내장식을 공부했다. 백인들 보니까 살아남는 방법은 실력 밖에 없는데 언어로는 경쟁이 안됐다. 그래서 미술로 바꿨다. 내 그림은 세계 최대의 문방구 회사인 미드사에 발탁돼 카드와 편지지로 제작돼 지금도 전세계에서 팔리고 있다. 첫 남편과 사별한 뒤여서 자랑을 못했지만 결국은 내가 이겼다."
◇장사에 뛰어들다="남편이 잘 해주는 대회가 있다면 1등할 자신있다"고 할 정도로 끔찍하게 해주던 남편은 이 씨가 서른이 되던 해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다운증후군을 앓던 첫 딸 리사는 다행히 잘 컸다. 십이지장과 심장판막 수술을 받았지만 잘 컸다. 그래도 남편의 빈자리는 컸다.
서울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비행기를 타기 1주일전 12세 연상의 중국계 남자가 그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우연히 들른 중국 음식점 주인이었다. 남자는 이미 이 씨를 알고 있었다. 저녁 먹자고 하더니 정말로 집으로 찾아왔다. 남자가 말했다. "난 영화 제작자였다. 이혼했다. 애가 둘인데 생활비를 보내야 한다. 스물 둘에 5억을 벌었지만 망했다. 지금은 한 푼도 없다. 동생집에 얹혀산다. 넌 나하고 결혼할 거다."
얼굴 까맣고 키 작은 남자가 결혼하고 싶다가 아니고 결혼하게 될 거다라니. 할테면 해봐라 콧방귀를 뀌었는데 다음날 짐 싸들고 찾아왔다. "살러왔다. 이 넓은 집에 여자만 사는데 위험할 것 같다. 방 많으니 잠깐만 살자. 넌 바쁠 테니 일봐라. 리사는 내가 봐줄테니 맘놓고 송별회 다녀라."
집으로 와 리사와 남자를 보니 아빠와 딸 같았다. 리사는 아예 남자를 아빠라 불렀다. "왜 아빠라 그러니." "아빠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진짜 아빠는 아니지만 아빠야." 자식이 그러니 얼굴도 하얗게 보이고 키도 커보이고 호탕한 끼가 멋있어 보였다. 지금도 리사는 아빠 편이다. 부부 싸움하면 아빠 편을 든다.
남편은 정말 알거지였다. 시집 식구가 매일 놀러 오는데 동생의 식당에서 받는 2000 달러로는 생활비도 안됐다. 첫 남편이 죽으면서 사회적 지위는 사라졌다. 이제 대접받으려면 오로지 돈 밖에 없었다. 남편을 식당 주인 아닌 비즈니스 맨으로 알려지게 하고 싶었다. 두번째 국제결혼. 한국의 친구들은 외로워서 그런 거라며 정신 차리라고 철야기도까지 했다. 그래서 더더욱 성공해야 했다.
"죽어라고 일했다. 예전엔 6시면 꽃과 와인에 우아하게 식사를 했는데 이젠 밤 12시에 퇴근해 새벽 1시에 저녁을 먹었다. 너무 피곤해 남편 얼굴이 2~3개로 보였다."
어느날 보니 돈버는 재미에 밤낮 모르고 일했다. 식당은 75번 고속도로를 따라 7개의 체인점으로 늘었다. 성공한 비즈니스 우먼으로 잡지와 신문에도 나고 오하이오주 공화당 경제자문정책위원 일도 했다.
◇내 일을 하자=어느날 문득 남편의 성공을 위해 달려온 삶이 허망했다. 한국가서 작품하자니 따라갈 수 있을까 싶었다. 영어가 딸리는 남편을 10년 동안 따라다닌 덕에 비즈니스를 배웠다. 비즈니스 노하우와 예술 감각을 살려 갤러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대만과 중국의 고미술품 수입해 판매하던 시동생을 보고 겁도 없이 중국 유명 화가 복사판 18만 개를 수입했다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남편 적금 깬 돈으로 시카고 아트쇼에 가서 죽을 각오로 첫 날 유명 작가 그림을 싹쓸이했다. 5년 동안 국제 아트쇼에 나가 좋은 그림은 다 샀다. 그림이 그렇게 많이 팔리지도 않을 작은 도시의 갤러리에서 싹쓸이하니 딜러들이 팔면서 걱정을 해줄 정도였다.
"난 밑에서 시작하지 않고 낙하산 타고 내리듯 위에서 시작했다. 갤러리 주인으로 아트 딜러로. 나나 뉴욕 그래픽 소사이어티 오너나 격이 같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딜러와 다 알게 됐다. 아트쇼에서는 어딜 가든 1인자와 악수한다. 가서 쓱 보면 누가 보스인지 안다. 인사할 때 보스는 보스와 만나야 한다. 밑에서부터 악수하면 안된다. 제일 위와 악수하고 그 다음에 아래로 가면서 악수해야 한다. 기죽지 말아야 한다."
96년 처음 화랑을 열 때 무척 힘들었다. 자기들도 힘든 미술품 딜러를 하니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동양계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지만 너무 소수여서 눈에 띄는 장점도 있다. 차별을 역이용할 지혜가 있어야 한다. 소수민족은 헤어지면 산다. 빨리 헤어져서 백인 속으로 들어가야 후손들이 그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우리끼리 해봤자 이대로 끝난다."
그는 소수계에 대한 차별을 희귀성으로 역이용하며 그만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는 여전히 이기희(Lee Kee Hee)다. 영어이름 안쓴다. "내가 영어 이름을 썼으면 머리 속에 각인되지 않았을 거다." 그는 항상 머리를 틀어 뒤로 묶고 다니는 이름에 ee가 3번 들어가는 기죽지 않고 당당한 동양계 여자로 기억된다.
데이턴에서 그림은 날개 돋힌듯 팔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못본 소도시의 생활 방식을 꿰뚫어 봤던 것이다. "오하이오주 그중에서도 중소도시는 가장 미국적이고 보수적인 곳입니다. 집을 꾸미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가정 위주의 생활을 합니다. 집을 장식하려니 그림이 필요하죠. 대도시는 집이 작아 소품 위주지만 여긴 집이 넓어 큰 그림이 팔립니다." 영국의 유명 작가 시이먼 불도 하루 판매량으로 가장 많았다며 놀랄 정도였다. 이제 윈드 갤러리에는 전시회를 하려는 유명 작가들이 몇 년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
◇도전은 계속된다=중소도시에서는 그림이 안팔린다는 고정관념을 깨며 9년 만에 중서부 최대 딜러로 성장한 그는 병원과 기업을 뚫고 있다.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간다' 프로젝트. '디자이너스 마켓 플레이스'가 리모델링을 하고 '윈드 갤러리'가 그림을 대여하는 방식이다. 전국 체인망을 갖고 있는 '사우스 뷰'와 '그랜드 뷰' 병원 3곳에서 실험을 해본 결과 반응이 좋았다.
그래도 문학은 그의 첫사랑이다. 글을 쓰려면 눈물부터 나온다. '여인과 집시'라는 인터넷 카페를 열어 칼럼과 에세이를 계속 쓸 생각이다. 또 한국에서 여성 전용 갤러리 카페를 열 생각이다. "21세기 한국 여성의 의식의 세계화 이런 걸 해보고 싶다. 혼자로는 안되고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한국 여성들의 인생 개척 모임을 만들고 싶다." 사고치고 수습하는 사이 여기까지 왔다는 이 씨가 한국에서 꼭 하고 싶다는 마지막 도전이다.

01.01.2005 LA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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