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칼럼[동서교차로] East Meet West

슬픔도 약이 된다

 

 

 

 

 

 

 

 


'Woman and Mirror'
By: Sabzi


여인은 우주를 향해 앉아있다. 여인의 눈은 흡사 마녀의 눈처럼 퀭하니 뚫려있다. 그녀의 눈은 세상의 모든 사랑ㆍ슬픔ㆍ아픔을 담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여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지 않다.
여인은 이 세상 모든 상처를 머리에 이고 끝내 영롱한 꽃으로 환생하고 싶은 것일까. 여인은 자신에게 지워진 숙명적인 삶을 피하지도 풀려고도 애쓰지 않는다. 그냥 응시할 뿐이다.
여인의 운명, 죄의 허물은 억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건 원초적인 슬픔이다. 이브가 저지른 죄악을 참회하며 여인은 슬픔을 홀로 견뎌낸다. 여자의 주변 머리 어깨 뒤편에는 온통 꽃들의 향연이다.
그 꽃을 몰래 훔쳐보는 뱀, 여인의 어깨보다 크고 황홀하게 만발한 꽃은 여인이 지닌 사랑의 아픔과 삶의 무게를 말해준다. 꽃은 슬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진정으로 슬퍼해본 사람만이 아름다운 꽃의 영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인의 눈을 비어있는 듯 하지만 여인이 응시하는 곳은 영혼의 자유로움이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다. 여인은 나비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시공을 초월해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되고 싶었다. 가시면류관 쓴다 해도 꽃의 여왕 돼 여인은 천년의 사랑으로 기억되고 싶었을 것이다.
'꽃과 여인의 영혼'을 그린 천경자의 작품을 나름대로 해석했다. '천경자 풍의 채색화'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천경자는 여인의 슬픔과 꿈ㆍ고독을 환상적인 색채의 화풍으로 담아냈다.
그녀의 실제 삶조차 그림 속 여인처럼 '슬프다, 아름답다, 화려하다' 등 단어가 의미 없을 정도로 아프게 살았다. 매듭을 풀지 못할 사랑과 인과에 영혼을 불사르며 '내일 아침이면 화사하게 피어날 장미의 붉은 정열과 견주기 위해서 밤이 있게 해야 하는 것'(천경자 수필 '오월초' 중에서)처럼 살았다.
삶은 삶 자체로 버텨나가야 할 여인의 숙명이었기 때문이다. 천경자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드나들며 인간과 인간 사이 벽을 허물고 남성과 여성의 형상을 초월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무엇이 무거울까?/ 바다 모래와 슬픔이,/ 무엇이 짧을까?/ 오늘과 내일이,/ 무엇이 약할까?/ 봄꽃과 청춘이,/ 무엇이 깊을까?/ 바다와 진리가.'(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 '무엇이 무거울까?')
무겁지 않는 삶이 있을까. 내 몸 하나 버티기도 버거운 하루, 힘들었던 어제와 숨가쁜 오늘, 아무런 약속도 기약도 없이 맞아야 할 내일. 시와 문학, 그림이 주는 위로가 없었다면 그 엄청난 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소리 죽여 우는 밤, 절망의 늪을 헤맬 때에도 슬픔은 강물 돼 바다로 흘러갔다. 힘든 세월의 강을 건널 때마다 예술은 작은 손놀림으로 아픈 등을 토닥여 주었다. 슬픔도 참고 견디면 인고의 한 송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꽃은 혼자 피지 않는다. 꽃받침에 발을 단단히 묶고 다른 꽃들과 어깨동무하고 한여름 폭우를 견뎌낸다.
신발이 무겁다고 신을 벗으면 맨발로 먼 길을 가야 한다. 영국 시인이자 고전문학자 시론가로 명망 높은 하우스먼(1859~1936)은 시를 쓰는 작업을 '상처받은 진주조개가 지독한 고통 속에서 분비작용을 해서 진주를 만드는 일'에 비유했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는 내적 고통과 갈등을 승화시켜 주옥 같은 작품을 만든다. 슬픔은 약이 되고 아픔으로 꽃이 핀다. 고통과 아픔을 품고 다스리면 영혼의 맑은 울림소리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해답이 없는 삶, 풀잎 같은 인생이라도 글과 그림과 예술로 승화되면 슬픔은 찬란한 꽃이 된다.

AϡuOAIˡ 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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